마을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찹쌀을 원료로 만들어 국화, 약초, 솔잎등을 넣고 빚은 양동청주는 단맛과 함께 은은히 느껴지는 술향이 일품이며 알코올 도수는 높지만 맛이 순하고 음주 후에도 머리가 개운한 것이 특징이며 숙취가 없다.
문헌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 마한 시대부터 한해의 풍성한 수확과 복을 기원하며 맑은 곡주를 빚어 조상께 먼저 바치고 춤과 노래와 술마시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농사를 시작하였을 때부터 술을 빚어 마셨으며 모든 행사에서 술이 애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청주는 일본의 술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본의 《고지키[古事記]》란 책에는 270∼310년 오진[應神] 천황 때 백제의 인번(仁番)이란 사람이 새로운 방법으로 희한한 술을 빚어서 세상에 선보였기 때문에 후세에 그를 주신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증보리(贈保利)형제가 새술의 창시자로 그들은 기록하고 있는데, 이 새로운 방법이 곧 누룩을 이용한 양조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인들이 자랑하며 자기들의 술이라는 청주가 실은 그 뿌리를 찾아보면 우리나라의 청주인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송.원대의 양조법이 도입되었으며, 전래의 주류 양조법이 발전되어 국(누룩)의 종류도 소맥국(小麥麴)과 미국(米麴)으로 이루어질 뿐 아니라 주품(酒品)도 다양해졌다.
청주(淸酒)는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맑은 술로서 탁주(濁酒)인 흐린 술과 크게 대별된다.
동국이상국집의 시 속에 『발효된 술덧을 압착하여 맑은 청주를 얻는데 겨우 4~5병을 얻을 뿐이다』라 하였고 고려도경에서는『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釀溫署)에서 다스리는데, 청주(淸酒)와 법주(法酒)의 두 가지가 있어서 질항아리에 넣어 명주로 봉해서 저장해 둔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발효된 술덧을 압착하거나 걸러내어 맑은 술을 빚었고 이미 덧술법도 사용하여 알코올 농도가 제법 높은 청주를 빚었을 것이다.
즉 발효가 끝난 술덧을 잘 걸러 내어서 부드럽게 마실 수 있고 맑게 한 술이 청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