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족의 연원
입향조는 손소. 신라초 득성조(得姓祖)인 구례마(俱禮馬)의 후손으로 효행이 알려진 흥덕왕 10년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월성은 경주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관향을 경주 혹은 월성이라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뒤의 세계가 실전되어 후손인 손경원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지 연혁
경주는 본래 신라의 옛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경주라 칭하였다.
성종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치고 영동도에 예속시켰고 현종조에는 강등시켜 경주 방어사로 하였으며 신라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관내의 주.부.군.현을 빼았아 안동.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때에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으로 되었다가 다시 행적구역 개편으로 경주시로 통합되었다.
주요집성촌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경주손씨 대종가가 5백년 동안 종통을 잇는 유서 깊은 민속 마을로 고색창연한 고옥마다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다. 대향조는 손소이다. 원래 양동리는 풍덕류씨가 살던 곳이었다. 손소가 25세때 류씨 집안의 복하란 분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 부락에 터를 잡게 되었다.
큰 아들은 백돈. 그러나 그에게는 후사가 없어 둘째 아들 중돈이 종통을 이었다. 그가 바로 조선 명현의 한 분으로 청백리에 오른 愚齊선생이다. 이로써 경주손씨는 양동에 토착기반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여기에 우재선생의 여동생 손씨부인이 여주이씨 이번과 결혼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동방오현의 한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이다.
이래서 양동은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전통적인 토성마을이 됐다. 대종가는 마을 동쪽 산등성이에 지붕을 드리우고 있다. 조선조 5백년 동안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우뚝 선 가옥이다.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본관 경주(慶州). 자 일장(日章). 시호 양민(襄敏). 1463년(세조 9) 식년문과에 급제, 주부(主簿) 등을 지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정, 난이 평정된 뒤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봉되었으며 내섬시정(內贍寺正)에 특진되었다. 공조참의 등을 거쳐 계천군(川君)에 봉해졌고 이어 성주목사(晋州牧使)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글씨를 잘 썼다.
손중돈[孫仲暾]
본관 경주(慶州). 호 우재(愚齋). 자 대발(大發). 시호 경절(景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2년(성종 13) 사마시(司馬試)에, 148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와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다. 1497년(연산군 3) 사복시정(司僕寺正) 때 파직, 1506년 중종반정 직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복귀, 공조·예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517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공조판서 등에 이어 도승지·대사간 등을 수차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경주(慶州) 동강서원(東江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서백당(書白堂, 중요민속자료 23호)
안골 중심지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이 마을의 입향조라 불리는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공이 성종 15년(1454년)에 지은 월성(月城) 손씨(孫氏)의 종가이다.
서백당(書白堂) 또는 송첨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白堂)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이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442호)
청백리로서 조선 성종(1469-1494)~중종(1506-1529)때 우재 손중돈(1463-1529) 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이며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자료 73호)
손중돈 선생의 아우되는 손숙돈(孫叔暾)공이 분가한 집으로 지금은 낙선당(樂善堂) 손종로(孫宗老)공의 파주손댁이며, 당시 양반 부잣집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수운정(水蕓亭, 중요민속자료 80호)
조선 선조 15년(1582년)경에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공의 증손인 청허재(晴虛齋) 손엽(孫曄)공이 건립한 정자인데 “물과 같이 맑고 구름같이 허무하다.”는 수청운허(水淸蕓虛)의 뜻을 따서 수운정(水蕓亭)이라 했다.
안락정(安樂亭, 중요민속자료 82호)
양동마을의 양대 성씨(姓氏)인 손씨와 이씨는 각기 자문(自問)의 서당을 보유하고 있는데, 안락정은 조선 정조 4년(1780)에 건립된 손씨 문중의 서당(書堂)이다. 이씨 문중의 서당인 강학당(講學塘)과 쌍벽을 이루며 마을 어귀인 양동초등학교 맞은편 언덕 위 산기슭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