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역사 학자인 善生助永氏의 자료와 1970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안계리 고분군(安溪里古墳群) 발굴 자료에 의하면 현재 마을의 주민생활은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하고 있고 또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씨(吳氏), 장씨(將氏) 유씨(柳氏)가 세거했다는 구전이 있으나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입향이래 마을의 인구 및 가구의 변화추이를 살펴보기 위해 월성손씨문중 소장의 동안(同案), 향약안(鄕約案), 호적 초안(戶籍 草案), 종길문(宗吉文) 및 최근의 통계연보를 보면 아래와 같다.
현황
행정리명
자연부락(마을)
세대수
반수
비고
양동리
양좌동
153
4
-
※ 2014.1.1현재
동족 조직
월성손씨 대종손의 19대조인 양민공 손소의 입향 후 그의 아들 손중돈의 누이 동생 손씨 부인이 여강이씨에 출가하여 사실상 두 가문은 외척관계에 있고, 월성손씨의 경우는 대종회, 문회(門會), 파회(派會)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여강이씨의 문중조직은 회재선생의 후예로 구성된 화수회를 중심으로 24개소가 있으나 양동마을의 경우 동근회(同根會)가 있다. 따라서 월성손씨 조직은 종파 중심으로서 양동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대되어 있다.
그 외 문중파별 세력이 서원이나 정자를 통하여 이루어져 숙종 정해년(1704년)에 건립된 동강서원(東江書院) 및 안락정, 수운정 등의 손씨 정자와 양졸정, 설천정, 동호정, 심수정, 영귀정, 육위정, 내곡정 등의 여강 이씨 정자 및 강학당, 경산서당이 있다.
교육 및 종교시설
교육시설로는 현재 양동초등학교 만이 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전에는 초등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심수정(心水亭:1560년 건립)이 서당 역할을 했고, 그 후 손씨의 안락정(安樂亭:1780년 건립)과 이씨의 강학당(講學堂)에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학생 자체에 대한 교육적인 열의는 경제적인 능력에 비해 매우 높아 대학원 진학을 예사로 생각하고 있어 과거 조상들의 학문을 통한 중앙진출의 학구열이 후대에까지 전하여 지고 있다 하겠다.
종교시설로는 현재 1947년에 세워진 불교 진각종 항설 심인당과 40평 규모의 기독교 장로교회가 있으나 과거 유림 양반체제의 영향 아래 신도수도 타성 일부와 인근 마을의 외부 사람이 대부분을 이룬다고 한다.
토지 및 가옥의 관리
토지 소유관계를 보면 토지를 전혀 갖지 못한 사람이 1971년 52%가 되고 나머지는 월성손씨, 여강이씨가 5단보 이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과거에 반상계급에 의한 소유분포를 짐작케 한다.
양동마을은 현재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와가(瓦家) 및 초가 전통 가옥이 비교적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지붕구조 일부가 개조되어 양기와 및 슬레이트에 조적도 가옥도 적지 않으나 연차적으로 원래의 모습으로 정비해 나가는 중이다. 이들중에는 근래에 지어진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