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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동마을 고대사를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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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일 2017-09-14 04:55:47 글쓴이 양인 조회수 57
    첨부파일 양좌동.hwp[2] 파일 다운로드


    양좌동(良佐洞)

    現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마을


    B.C 169년에 탐라국의 시조 양을나(良乙那) 후손인 72세을나 부교왕(夫交王)이 동쪽에 진한(辰韓)이 있음을 전해 듣고 사신을 보내니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B.C 74년에 75세을나 월점왕(月占王)이 동생 지백(之伯)을 진한(辰韓)으로 보내니 육부(六部) 촌장의 딸과 혼인하여 살았다. 그 곳이 경상북도 경주시 양좌동(良佐洞 지금의 양동마을)이다. 실로 천여년 이곳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영화를 누리며 개척영위(開拓營爲)하여 씨족의 세거지(世居地)를 이루었다. 신라와 고려시대는 융성하였으나 조선 초기의 역성혁명의 난세(易姓革命亂世)를 피하여 왕제 후손의 외가인 월성손씨(月城孫氏)에게 모든 것을 미루고 양산 남원 마산 김해 부산 등지에 모두 출향하여 지금 양좌동에 양씨는 한가구도 없다.

    양좌동(良佐洞)이라는 이름은 최초 진한(辰韓)시대 양을나 (良乙那)후손들이 제주에서 이거하면서 <양()씨들이 다스리는 땅>이라 하여 붙여졌고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이곳을 양좌현(良佐縣)이라 하였다. 탐라국(耽羅國)에서 이거한 양씨(良氏)들의 세거지로 한반도 동쪽 진한(辰韓) 땅에는 양좌동(良佐洞)이 있고, 서쪽 마한(馬韓)땅에는 양과동(良苽洞)이 있었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良苽洞)은 이미 잘 알려진 양씨들의 세거지이다. 조선 초․중기의 역성혁명과 사화를 피하여 후손의 외가인 경주최씨(慶州崔氏)에 미루고 인근으로 흩어진 경우와 같다 하겠다. 광주 양과동(良苽洞) 역시 기원전 4세기부터 영산강 유역에 탐라국에서 이주하여 살았다. 특히 679년 탐라가 신라의 경락으로 통합되자 100대을나 탐신왕(耽新王)의 장자 양순(梁洵)이 682년에 신라의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지자 이와 합세하여 제주(濟州)를 관()으로 후세대대로 위국저성에 이르렀다. 신라와 고려조에는 매우 융성한 세거를 이루었으나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사화를 피하여 외가인 경주최씨(慶州崔氏)에 미루고 주변으로 흩어지고 지금은 한가구도 없다.

    서기 559년 신라 내물왕 18년에 양탕(良宕)이 신라에 사신 광순사(廣巡使)로 가시니 내물왕이 환대(歡待)하시고 중상작록(重賞爵祿)과 함께 금수의관(錦繡衣冠)을 받았으며, 성주왕자(星主王子)에 봉해졌고 신라왕의 사성(賜姓)이 전례(典禮)에 따라 양자성(良字姓)을 고쳐 양자성(梁字姓)을 쓰시도록 개사성(改賜姓) 하였다. 이리 하여 자자손손은 양자성(梁字姓)을 쓰게 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좌동(良佐洞)을 중심으로 융성한 세거를 이루며 살았던 양을나 후손들의 인물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신라개국공신 부족장 양지백(良之伯) :

    B.C 74년에 탐라국의 시조 양을나(良乙那) 후손인 75세을나 월점왕(月占王)의 동생으로 진한(辰韓)으로 이주하여 육부(六部) 촌장의 딸과 혼인하여 살았다. 그 곳이 경상북도 경주시 양좌동(良佐洞 지금의 양동마을)이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B.C 57년에 신라를 개국할 당시 개국공신 20대 족장 중의 한분으로 아산박씨(牙山朴氏) 수보(修譜)서원문(序源文)에 활자화 되어 전해져 있다.

    2000년 만에 밝혀졌음은 실로 경이적인 사실(史實)이 아닐 수 없다. 관()이 장도부총(將刀副總)으로서 옥저(沃沮)에서 마필(馬匹)을 크게 헌상한 대공의 유공자로 추대되고 있다.


    ◉ 신라개국공신 정남장군 양선태(良善泰) :

    B.C 74년에 왕제(王弟) 지백(之伯)의 안무사(按撫使)로 함께 진한(辰韓)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B.C 57년에 신라를 개국할 당시 26대 개국공신 중의 한분으로 관()이 정남장군(正南將軍)이었다.

    B.C 37년에는 신라와 고구려 고주몽왕(高朱蒙王)과의 강화조약(講和條約) 체결에 있어서 대공을 세우신 유공자로 추대되었다.


    ◉ 신라 미추왕조 서불한 양부(良夫) :

    양부(良夫)의 선계는 진한(辰韓) 6부 시대에 탐라로부터 바다를 건너 신라의 양좌동(良佐洞)으로 이거하여 여러 대에 걸쳐 건국 위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신라 초기부터 명문으로 등장하여 공훈과 세록(世祿)이 많았다.

    양부(良夫)는 석씨왕조(昔氏王朝)인 첨해왕(沾解王)3년 서기249년 7월에는 양부(良夫) 38세에 국가에 유공하여 높은 벼슬인 신라관직으로 이찬(伊湌: 眞骨二品)을 13년간이나 역임하였다.

    신라의 석씨에서 김씨로 교체된 첫째 임금 미추왕조(味鄒王朝)에서 왕조 교체에 특수한 대공을 세워 서기263년 정월 미추왕 2년에 신라관직으로 제1품인 서불한(舒弗邯 宰相 또는 伊罰干, 干伐滄,角干, 角粲, 舒發翰 舒弗邯이라고도 했다.)에 오르고 내외병마사(內外兵馬使)를 겸하게 되었으니 군국(軍國)의 대권이 일시에 장악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미루어 볼 때 첨해왕 2년에서 미추왕 2년까지 14년간으로 장기 겸직하므로 석()씨 왕조에서 김()씨 왕조로 정권교체 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장기간 벼슬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음을 볼 때 확고한 기반과 탁월한 인격,그리고 넓은 도량의 달인이었다는 시실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김씨의 초대왕조인 미추왕이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1품직을 양부(良夫)에 제수한 사실을 살펴본다면 그 분의 지덕과 문무가 얼마나 출중하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 신라 미추왕조 일길찬 양질(良質):

    양질(良質)은 양부(良夫)가 미추왕2년 정월에 일품직 서불감이 되신지 미추왕 20년 서기 281년에 7품직인 일길찬(一吉湌 : 乙吉干 이라고도 함) 방어사(防禦使)에 임명되었다. 신라 17등급의 관직에서 7등관이 되려면 다년간의 관직생활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서불감 겸 병마사의 이동이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관직의 고하는 있다하더라도 양부(良夫)와 양질(良質)은 같은 시대 같은 조정에서 벼슬을 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면 18년간이란 간격을 두고 양부(良夫)는 1품직을 양질은 7품직에 계셨지만 그 공적과 나이 차이는 상당히 많았다. 또 신라에서는 귀족의 친척이나 유공자가 아니면 벼슬을 주지 않았던 예로 볼 때 양부(良夫)와 양질(良質)은 부자지간이거니 근친이거나 그리 멀지 않은 족친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훌륭한 가통을 이어 받은 양질(良質)은 여러 계급의 벼슬을 지낸 뒤 미추왕 20년에 일길찬(一吉湌)이 된다.

    동직에 임명된 지 2년 후인 미추왕 22년 9월에 백제가 변방을 침략하고 10월에 괴곡성(槐谷城 : 지금의 괴산)을 포위하여 위험화게 되자 국왕은 여러 조신 중에서 특별히 양질(良質)을 발탁하여 영병사(領兵使)에 임명하고 백제군사가 침공한 괴곡성(槐谷城)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방어의 책임을 맡도록 했는데 선전(善戰)으로 적을 격퇴하여 큰 공훈을 세웠다.


    ◉ 신라 최고의 불상 조각가 양지(梁志) :

    양지(梁志)는 신라말기에서 통일기에 이르는 변천기요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공세기로 40여성이 백제에 의해 공략 당하던 신라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유일한 인물로 등장한다. 때문에 신라는 전시체제에 놓여 안으로는 성골(聖骨)이 등장하고 밖으로는 나당연합(羅唐聯合)으로 고구려 백제를 견제 또는 공략 점령 통합하는 과업을 이루기 위한 국민정신을 하나로 묶는 국책으로써 불교를 통한 불사를 일으키게 될 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양지(梁志)는 서기634년 신라선덕왕 3년에 분황사(芬皇寺)를 그 이듬해에는 영묘사(靈廟寺)틀 창건하였으며 선덕왕 5년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도와 신라에서 불교를 체계화하는 데 공을 세웠다.

    양지(梁志)는 또한 황룡사 9층탑을 조성하였고, 사천왕사(四天王寺),석장사(錫杖寺) 등의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여 국민교화의 일익을 담당 신라 통일의 정신적 운동에 핵심적인공헌으로 통일과업을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양지(梁志)의 도력(道力)은 신통(神通)의 경지로 상상을 초월한 신의능력(神意能力)을 발휘함으로써 재전덕충대방고덕(才全德充大方高德)의 수행으로 진흙 속에서도 찬란한 마니보주(摩尼寶珠)와 같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교화적 측면의 성직자로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다.

    아울러 양지(梁志)는 신라 최저명(最著名)의 조각거장(彫刻巨匠)으로 꼽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영묘사(靈妙寺)의 장육삼존(丈六三尊) 천왕상(天王像),대왕사(大王寺)의 탑하팔부신장(塔下八部神將),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 좌우 금강신상(金剛神像) 등을 조각하였다.

    서기 1986년 3월〜5월에 이르는 석장사(錫杖寺)의 출토 유물에 의하면 당대에 이미 인도 간다라 문화와 동일한 작품으로 기법 상 고찰된 바로 미루어 젊을 때 수행 중 인도에 유학을 한 국제적인 인물로 판독되고 있다.

    사천왕사지에서 발굴된 사천왕사 좌대의 작품이 서방미술과 동일 시 되고 있어 그 정신이 서방으로 뻗어간 것으로 전하고 있다. 불탑과 불상이 새겨진 전탑(塼塔) 벽돌 등 190여점이 새로이 출토되므로 선조의 예술 세계는 실로 1300년 만에 재회(再會)된 예술의 극치(極侈)로 재평가되고 있다. 선조의 현란한 작품세계의 진면목이 드러내게 되었다. 전탑과 벽돌에 새겨진 불상들은 3000불탑의 존재를 입증하였고 기예(技藝)에 능통하여 작품표현 기법의 신묘함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전탑과 탑상문에는 연기법송(緣起法頌)19자가 새겨져 있음을 현대 최신 과학 장비를 동원하여 판독해 낸 문장은 <諸法緣起 如來說 是因彼法因緣盡是大沙門說>이라고 쓰인 양지(梁志)의 친서로 판독되었다.


    ◉ 신라의 이방부령 양수(良首) :

    양수(良首)는 신라의 태종무열왕조에 법률을 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기 654년 무열왕 원년 신라의 이방부령(理方府令 : 법률심의관)으로서 60조의 법률을 제정하였다.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에 17등급의 직제를 정한 것 등 신라 초기에도 간단한 율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열왕 때와 같이 60조에 달한 법전은 없었으니 그 당시로서는 대대적인 법전 정비작업이 아닐 수 없다.

    여러 벼슬을 거쳐 이방부령(理方府令)에 오른 것으로 보이나 령의 직위는 9품에서 3품까지 속한다. 여러 가지 기록으로 미루어 이방부라는 것은 당시에 있었던 법률심의 기관인 듯하다.


    ◉ 신라 무열왕조 일길찬 양신(梁臣) :

    양신(梁臣) 역시 선계와 가벌에 대한 문헌은 없으므로 앞 뒤 사적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신라의 태종무열왕 때에 7등의 높은 관직인 일길찬(一吉湌)을 지냈으며 삼국을 통일함에 있어 많은 전공을 세우신 분으로 보여 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신라군의 일길찬(一吉湌) 양신(梁臣)이 나당(羅唐)연합군 당총수(唐總數) 고보(高保)와 합동작전에 참여하시어 석문성(石門城)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패전하니 이곳에서 순절(殉節)하시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지만 사망한 해는 서기 672년 신라 문무왕 12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양좌동 가까이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위와 같이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음을 뒷받침해 준다.


    양좌동이 삼한 시대에 제주에서 이거한 양을나 후손이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융성하였으나 이씨조선이 건국되면서 역성혁명에 따르지 않았던 이들은 화를 피하여 외손인 월성 손씨에 넘겨주고 주위로 흩어져 구명하여야 하였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등 두 씨족에 의해 틀을 갖춘 것은 15세기 무렵이었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등 양대 성씨를 대표하는 인물 모두 선조가 처가인 양좌동으로 이사와 터를 잡으면서 부터다. 이곳이 ‘외손마을’로 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월성손씨 대종손의 19대조인 양민공 손소의 입향 후 그의 아들 손중돈의 누이 동생 손씨 부인이 여강이씨에 출가하여 사실상 두 가문은 외척관계에 있고, 월성손씨의 경우는 대종회, 문회(門會), 파회(派會)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여강이씨의 문중조직은 회재선생의 후예로 구성된 화수회를 중심으로 24개소가 있으나 양동마을의 경우 동근회(同根會)가 있다. 따라서 월성손씨 조직은 종파 중심으로서 양좌동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대되어 있다.

    그 외 문중파별 세력이 서원이나 정자를 통하여 이루어져 숙종 정해년(1704년)에 건립된 동강서원(東江書院) 및 안락정, 수운정 등의 손씨 정자와 양졸정, 설천정, 동호정, 심수정, 영귀정, 육위정, 내곡정 등의 여강 이씨 정자 및 강학당, 경산서당이 있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좌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좌동이 형성되었다.

    양좌동(良佐洞)은 양동마을으로 하여 1984년 12월 20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제(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제주양씨의 1500여년에 이어 월성손씨와 여강이씨 종가가 600여년 동안 전통을 잇는 유서 깊은 반촌 마을이다.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특이하게 양()씨에 이어 손(), 이()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21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문화 보존 및 볼거리, 역사적인 내용 등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마을이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6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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